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 붕괴 (문단 편집) === [[8월 쿠데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8월 쿠데타)] [[1991년]] [[8월 19일]] 당시 소련 부통령이었던 [[겐나디 야나예프]]와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KGB 주석이었던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등 소련 정부 내 요직에 있던 8명은 고르바초프가 [[크림 반도]]에서 휴가 중임을 틈타서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ГКЧП, GKChP)를 조직해 소련 정부를 장악했다. 모스크바 근교에 주둔하던 타만 사단과 칸테미르 사단은 대규모 전차 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전역을 장악했다. 소련 방송들은 고르바초프가 "건강 이상"으로 급작스럽게 그만두어 부통령인 야나예프 및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대신한다고 보도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기자 회견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소속된 주요 간부들은 신연방조약이 소련을 "혼돈과 무정부"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킨 '''쿠데타'''였다. 이미 소련에서는 1990년 말부터 쿠데타에 대한 징조가 보이고 있었다. 1990년 12월 소련 외무부 장관이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는 보수파에 반발해 사임하면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1989년 4월 [[트빌리시]]와 1991년 1월 [[빌뉴스]]와 [[리가]]에서 소련군 및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해 독립운동을 유혈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군을 동원한 무력진압은 오히려 연방 내 공화국들로부터 반발이 극심해지면서 결국 실패했다. 1991년 6월 17일, 당시 모스크바 시장이었던 가브릴 포포프는 미 대사에게 쿠데타가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1991년 7월 소련 정부기관 내 주요 인사들은 당시 강경보수파 계열 신문이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 "인민들에게 고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해당 선언문은 고르바초프를 강경하게 비판하면서, 소련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고르바초프에 맞서는 새로운 야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Mark Kramer (2022) [[https://doi.org/10.1162/jcws_a_01059|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2] 쿠데타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과거 [[니키타 흐루쇼프]]와 같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의 생각과는 다르게 소련인들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도인 [[모스크바]]를 비롯해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 [[키이우|키예프]] 등 소련 내 주요 도시에서 쿠데타에 반발하는 시위가 빗발쳤다. 당시 [[러시아 SFSR]]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생방송 기자회견을 통해 쿠데타에 맹렬히 맞설 것을 주문했다. 이에 주요 공화국 지도자들과 국제 사회는 옐친을 지지하면서 쿠데타 세력이 소련을 장악할 경우 경제 지원을 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황한 쿠데타 세력은 군을 동원해 러시아 최고회의가 위치한 백악관에 대한 무력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대규모 사상자가 나올 것을 우려한 군 지휘관들은 쿠데타 세력의 명령을 거부했다. 당시 소련군 기갑부대가 모스크바에 위치한 최고회의 청사로 향하는 지하차도로 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려던 3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제 쿠데타 세력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자신들에게 협조할 지 확실치 않은 군사력을 동원해 소련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감수하면서 정국을 장악할지, 아니면 실패를 인정하고 순순히 항복할지였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소련인들의 반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실상 항복했다. 쿠데타에 가담한 대부분의 간부들은 체포되거나 몇몇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실패했다. 쿠데타의 실패는 이후 소련 정국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Mark Kramer (2022) [[https://doi.org/10.1162/jcws_a_01059|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2-203] 쿠데타 실패를 계기로 소련 정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고르바초프 정권을 지탱하던 소련의 정치인들이 죄다 쿠데타에 동참해버렸기 때문이다. 쿠데타의 최고 수혜자는 쿠데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옐친이었다. 이미 고르바초프는 옐친에게 권력의 반은 넘겨줘야 할 것이라고 예측되었고 결국 그 해가 가기 전에 소련이 망해 그나마 반도 지키지 못했다. 반신불수가 된 소련 정부는 1991년 9월에 가장 독립 열망이 강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